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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풍갤러리 이야기

    I화순민간속담

    가난하면 타지에 가서 돈을 번다.

    상강이 지나면 각자 방향을 찾고.。

    추목이 꽃이 피면 나그네는 집으로 돌아온다.

    삼대가 공부를 하지 않으며 한 우리의 돼지와도 같다.

    부귀는 3대를 넘지 않으며 학자풍은 백세를 전승한다.


    II. 주이방편: 사조국사

    “주이방”은 미얀마 등 동남아시아국가로 나가 생계를 꾸리고 창업하는 과거의 화순인들의 주요 생존방식이다.

    청나라말년에 하순의 가난한 자제 윤용은 “주이방”을 떠나 미얀마로 가서 민델러의 “삼성호”에서 견습공이 되었다. 그는 미얀마왕궁에 자주 가서 비단을 팔았다. 미얀마의 비간왕은 사람이 후하고 유능한 것을 보고 그를 국사로 임명하여 궁중의 “일체 외교, 내정, 비즈니스는 대다수 윤용이 결정했다”. 윤용은 미얀마왕을 위해 황성을 설계하고 감독건설했으며 미얀마왕실의 분쟁을 조정해결했다. 미얀마의 사조국사를 역임했다. 민국원로 이근원은 시를 써서 윤용을 칭찬했다: “청계로 윤용, 미얀마의 괴수. 망왕은 스승으로 모시고 한마디 말에 만인이 복종한다”.

     


    III. 주이방편: 비취대왕

    화순인들은 고생을 참아내며 일을 하고 경영에 특기가 있어 청나라 도광년에 이곳에 윈난에서 최초로 국경을 초월하는 상호 “삼성호”가 탄생했다. “주이방”의 화순인들중에는 몇명의 “비취대왕”이 나왔다.

    화순인 장덕형(자 보정)은 미얀마의 옥석공장에서 “보강”을 맡았다 새로운 채굴과 관리방식으로 좋은 비취가공을 홍콩, 광저우와 세계각국으로 판매함으로 “비취대왕”이라는 칭호를 얻었다. 당시 영국식민지였던 미얀마에서 장덕형은 항상 중국상인들을 위해 정의와 공정한 말만 하였으며, 또한 미얀마시정건설에 힘을 써 영국인들의 존경을 받았다. 영국여왕은 그에게 특별히 상장과 어차인 백마차를 주었다.

    화순인 촌존복(자 해정)은 “비취대왕”이라고도 불린다. 그는 재물을 모으지만 정의를 잊지 않고 양곤에서 동맹회에 참가하여 윈난영창봉기, 하구봉기, 텅월봉기와 광저우황화강봉기에 재력을 기울여 지지했다. 손중산선생이 “화교 지도자, 민족의 빛”이라고 칭찬했다.


    IV. 격려편: 증관격부…    

    화순은 예로부터 “주이방” 전통이 있다. 이곳의 남자들은 가난과 부유에 상관없이 성년이 된 후에는 미얀마로 가서 일을 하여 생계를 꾸렸다.

    청나라 말에 마을에는 한 선비가 있었는데 고시를 통해 공명을 얻은 후 집에 있는 편안함을 탐하여 밖에 나가질 않았다. 사람들을 만나면 “나는 공명이 있는 사람이다”라고 말했다. 선비의 아내가 여러번 권고를 했지만 효과가 없었다. 하루는 밥을 먹을 때 선비의 모자를 시루에 쪄서 밥상에 올렸다. 선비가 이해를 못하자 아내는 “당신은 공명을 드세요”라고 했다. 선비는 그 말을 듣고 부끄러워하며 아내의 고심을 깨닫게 되었다. 그리고 마을사람들을 따라 “주이방”을 떠나 생계를 꾸리고 창업을 했다.


    V. 가국편: 만문충열

    텅월지, 화순향은 대다수 변경을 지키는 장병들이 개간한 것이다. “나라가 있어야 집이 있다”라는 전통을 계승하여 사병과 농민 상인 상관없이 모두 국가에 보답하고자 하는 마음이 있었다. 그중 촌씨의 만문충열의 이야기는 널리 전해지고 있다.

    촌대진은 청나라 말 무과인이고 중여수비를 임했다. 변방의 군민들을 이끌고 여러번 영국군을 물리쳐 광서황제로부터 세습1등용기도위로 임명받고 1등한군광용바투로의 칭호를 받았다. 1942년 88세의 촌대진은 일본군에게 점령당한 청월성을 바라보며 소서라기평촌뢰타나무아래에서 단식으로 사망하여 민족의 기개를 드러냈다.

    촌대진은 9명의 아들이 있으며 모두 항일전재에 참가했고 3명의 아들이 국가를 위해 목숨을 바쳤다.

    3번째 아들은 촌성기이며 “항일군중의 호랑이 장군”이라고 불리웠다. 1941년5월 산서성 중조산전투에서 장렬하게 순국했다. 국민당혁명군 제3군 제12사 사단장을 임하였고, 나중에 육군중장으로 추가 임명받았다. 4번째 아들 촌성록은 원정군 중령을 임했으며, 1944년 11월에 용릉정복전투때 장렬하게 순국했다. 5번째 아들 촌성복은 중앙레이윤공항 지상수비대 대령대대장을 임했으며 1942년 5월 레이윤공항을 보위하기 위해 장렬하게 순국했다.


    VI. 영재편: 이씨3걸

    화순문교가 흥성하여 영재들이 배출되었다. 이왈해, 이생장, 이생훤부자는 그중의 대표로서 이씨3걸로 불린다.

    이왈해(1881-1944), 자는 자창이고 경사대학당을 졸업했다. 동맹회회원이며 윈난신해혁명과 소국운동의 원로중의 일원으로 호국군수령 채곤의 비서를 임했었다. 이왈해는 문채가 특출하여 장태염은 이를 “천남일지필”이라고 칭했다. 1930년 이왈해는 윈난제일식변감독을 임했으며 전서행정을 근 10년간 임하여 변방의 도로수리, 광산개광, 수력을 흥하고 교육를 하며 경계를 조사하는 등 많은 실용적인 일을 했다.

    이생장(1940-1945), 이왈해의 장자이며 1926년에 동남대학에서 서양철학을 공부했다. 중공지하당원이다. 1928년 윈난성립1중에서 교편을 잡았고 윈난<민중일보>의 부편집장을 겸임했다. 1930년에는 윈난성 제1식변감독 관공서 비서 겸 화순도서관관장을 겸했다. 1935년9월에는 텅월변지간이사범학교에서 교장을 겸임했다. 1937년에는 <텅월일보>를 창간했으며 사장을 임했다. 나중에 성정부 비서총장으로 전임되었다.

    이생훤(1910-1966년)은 이왈해의 차남이며 필명은 아이스치이다. 중국의 걸출한 무계급혁명가, 유명한 마르크스주의 철학자, 교육자이며 중국공산당이 이론전선에서의 충성전사다. 그는 철학대중화, 통속화의 선하를 개창했으며 주요 작품으로는 <대중철학>, <철학과 생활>, <변증유물주의역사유물주의> 등이 있다.


    VII. 예의편: 사화민순

    민국원로 이근원은 시로 화순을 칭찬했다. “10인 8, 9 미얀마에서 장사를 하고 계산하고 계획을 세우는 것이 가장 뛰어나다. 부유함은 예의를 더 잘 알게 하고 남주는 고대명향이라고 관왕한다.”

    청나라 광선년간의 화순은 민풍이 순박하고 백성들은 규율과 법을 잘 지켜 사회치안이 양호했다. 텅월청에 임하고 있던 진종해가 취임이래 화순에서는 1건의 소송사건이 없었다. 이를 의심하여 화순에 몰래 내려와 조사를 한 결과 화순의 민풍이 순수하고 이웃들사이에 평소에 가끔 작은 분쟁이 있어도 서로 양해하고 양보하는 것을 보게 되었다. 이러한 온화하고 순박한 향품에 감동하여 흔쾌히 “사화민순”이라는 4글자를 써서 찬양했다.

     


    VIII. 성심편: 십금후주

    화순인 윤기순은 어릴 때 아버지를 잃고 남을 대신해 말풀을 베어 생계를 꾸렸다. 13~4살에 “주이방”이 되어 미얀마에 도착해 장터에서 노점을 차렸다. 하루는 방부족 대상인들이 자신들의 포대를 윤기순의 노점에 두고 갔다. 윤기순이 이것을 발견했을 때 그들은 이미 보이지 않았다 그후 윤기순은 포대를 잘 보관해놓고 평소에는 이동해야 하는 노점을 그 자리에 고정하고 주인을 기다렸다. 반년후 그 부족상인들이 또 노점을 지나갈때 윤기순은 그 포대를 완벽하게 돌려주었다. 부족상인들은 잃어버린 포대를 열어보았는데 그 포대안에 있던 거액의 돈은 한푼도 잃어버리지 않았다. 그는 윤기순의 성실하고 너그러운 인품에 감동하여 그를 토산품의 대리상으로 요청했다. 기타 부족상인들도 모두 따라했다. 이후 윤기순은 “옥순흥”이라는 상호를 만들었으며 나중에는 큰 부자가 되어 금의환향하고 고향에 보답하여 미담으로 전해졌다.


    IX. 권학편: 현대교육주휘황

    “충효사를 힘을 다해 행하고, 성현의 책을 많이 읽어라”. “어려서 배우지 않으면 늙어서 짐승과 다를바 없고, 3대가 책을 읽지 않으면 소와 말과 같다.” 화순인들은 자고로 교육을 중시했다. 이곳에는 전통적인 서당, 서관이 있을 뿐만 아니라 청나라말 민국초기에 이르러 서양 학문이 동양으로 들어오고 새로운 사조가 쏟아져 나왔다. 미얀마 등 국가는 영국식민통치시기에 처해 있었고 화순인들은 대다수 이곳에 많이 살고 있었다. 이로 인해 화순은 먼저 기세를 얻었고 현대교육의 체계가 이곳 변지마을에서 점차적으로 구축되었다. 무술변법후 이곳에는 전서 최초의 여자학교 “명덕여자학당”이 탄생되었으며, 1909년 화순에는 2등 소학당, 1940년에는 유명한 교포학교 익군중학교가 설립되었다. 특히 지난 세기 20년대의 화순인들은 “합덕지체병육”이라는 교육주장을 명확히 제기하고 실천했다. 청나라 말 민국 초기에는 일본유학을 간 화순인들이 12명이나 된다. 현대교육의 발전은 화순의 근현대의 휘황을 이루었다.


    X. 효도편: 회막경친

    화순인들은 옛 예절을 존중하고 효도를 말하며, 효자는 마을사람들 속의 도덕본보기이다. 장종인이 그중 한 사람이다.

    청나라 강희46년(1707년) 화순인 장종인은 텅월주부차견에서 복역하였으며, 그는 관가에서 준 만두를 먹지 않고 품에 안았다. 지주 오월이 이것을 알고 물어보자 그는 집에 노모가 밥을 먹지 못하고 있어 만두를 품에 안았다가 노모에게 효도한다고 했다. 지주는 그의 효도에 감동을 받고 현판을 쓰고 그에게 상을 주었다. 연운: 효익텅양군, 인다화순향. 편왈: 전성가관. 현판과 대련은 사람들에 의해 지금까지 걸려있다.


    XI. 근면편:부불망본

    화순인들은 근검한 미덕을 추양하며 가난과 부에 상관없이 모두 근검으로 몸과 마음을 다스리는 반드시 지켜야 할 가치관으로 여긴다. 근검은 화순인들에게 가난한 사람의 의지를 더욱 굳게 하고 부자는 초심을 잊지 않게 한다.

    민국년간 마을의 소년 윤기순은 생계를 꾸리러 미얀마에 갔다. 근면성실하게 일하여 나중에는 부자가 되어 마을사람들은 그를 윤나리라고 존칭했다. 그는 비록 부유했지만 간단한 식사를 하고 편안한 옷차림을 하는 여전히 그 당시의 근면한 기풍을 유지하고 있다. 현나리의 같이 의사를 논의하자는 요청을 받고 그는 구두를 짊어지고 짚신을 신고 도시로 갔다. 그리고 도랑에 가서 발을 씻고 구두를 신은 다음 시내로 갔다. 어렸을때 집이 가난하여 변변한 옷이 몇가지 없었기 때문에 옷이 닳을가봐 밤에 옷 입고 자는 것이 아쉬웠다. 나중에 돈을 많이 벌었어도 이 습관은 고쳐지지 않았다. 그는 어려움을 구제하고 선행을 하였으며 이러한 공익에 열심이었던 이야기는 지금도 여전이.


    XII. 생태편: 호수명시<두 그루 삼나무행>

    청산녹수에서 거주하고 있는 화순인들은 예로부터 사람과 자연의 화목을 중시했다.

    화순의 괴각에는 500여년이 된 두 그루의 참으루나무가 있다. 1931년에 어떤 사람이 이 두 그루를 베어 다른 용도로 사용하려고 했지만 마을 사람들의 반대를 받았다. 그때 윈난제1식변감독의 이왈해는 민중을 이끌고 나무를 보호했으며, <두 그루 삼나무행>이라는 긴 시를 써서 비석에 새겼다. 시의 마지막 한마디는 “이 나무를 벌목하는 자는 머리를 벨 것이다”이며 이것은 마을의 규칙이 되었다. 이 두 나무는 지금까지도 <윈난고목명목>에 들어있다.


    XIII. 가국편: 중국판 <마지막 수업>

    19세기 70년대 프랑스가 프로스에게 점령당했을 때 프랑스 작가 도드는 유명한 <마지막 수업>을 썼다. 1942년 5월 화순의 순창궁에서도 중국판 “마지막 수업”이 실감있게 펼쳐졌다.

    1942년5월 8일, 텅총이 곧 일본에게 점령당하기 전이다. 익군중학교교장 촌수성선생(1896-1978)은 화순순창궁에 전체 학생교사들을 집합시키고 “마지막 수업”을 진행했다. 그는 “...... 시국의 상황은 너희들도 이미 알고 있을 것이다. 나는 단지 우리가 아직 자기를 보위할 힘이 없다는 것이 원망스럽다. 내가 너희들을 보호하지 못하고 인도하지 못한다는 것이 원망스럽다!...... 평소에 너희들에게 이야기한 것을 잊지 말기 바란다. 너희는 어려운 환경속에서도 너희들의 정신을 단련시키고, 투쟁속에서 너희들의 힘을 발전시켜야 한다! 나는 황제의 모든 자손들은 순민이 될수 없고 노예가 되는 것을 달가워 하기 않을 것이라고 믿는다!......”


    XIV. 경독편: 숭문중교문운장

    화순인들은 “경독은 가문을 오래 계승하게하고, 서향은 세상에 오래 계속된다”의 진리를 깊이 알고 있다. 지금도 문창관에는 “이조과갑제 명비”가 존재하고 있으며, 명나라와 청나라 두 시대에 공명을 거둔 화순인은 모두 809명이다. 그중 거인은 8명, 수재가 600며명이고, 조정에서 관직을 맡은 사람은 180여명이다. 화순역사상 많은 거인, 수재들이 “마을에 장부를 만들고”, 서당을 운영하고, 의학, 2등소학교, 여자학당등을 만들었다. 수백년동안 좋은 기풍이 널리 퍼졌다. 그중 양수익선생이 설립한 홍농국학전수관의 시간이 20세기 20년대부터 50년대까지 가장 오래되었다.


    XV. 가원편: 군둔수변

    600여년전 명나라 홍무년에 변강을 보호하기 위해 쓰촨, 후난, 강소, 강서 등지의 장병들은 조정의 파견을 받고 멀리 화순에까지 와서 변경에 군둔하였다. 명나라는 위소군둔제를 실시했고 군대는 “3분은 파견일을 하고 7분은 땅을 갈고 파종한다”. 위소군정은 1인1가구로 하고 “군호”로 칭했으며 가족을 데리고 갈수 있다. 즉 군적에 속하고 대대로 그 직을 물려받을수 있으며 조정에서 땅을 나누어주어 일이 있을때는 전투에 참가하고 없을때에는 농사를 짓게 했다. 명나라 홍무년부터 촌, 유, 이, 윤, 가, 장, 양, 천, 허, 조 10대 종족의 성이 여기에 정착하여 지금까지 살고 있다. 600여년동안 모든 성씨가문들은 화목하게 공존해왔고 마을에는 아직도 8개의 큰 성씨의 사당이 남아있다.


    XVI. 공익편: 공익선거보가방  

    남 돕기를 좋아하고 공익에 열심인 것은 화순인들의 전통이다. “주이방”으로 외지에서 생활하는 화순인들은 성과를 거둔 뒤에 고향으로 돌아와 자신의 집을 짓고 또 “공익을 하자”를 행하여 “고향에 보답하자”는 소원을 실천했다. 이러한 전통으로 인해 지금 마을에는 공공시설이 널리 퍼져있다. 골목입구의 마을문, 월대, 사당, 세탁정자를 비롯해 도서관, 중학교, 초등학교들은 모두 대대로 화순인들의 공익심을 보여주는 증거들이다.

    화순인들의 공익심은 식견과 포부에 따라 민족대의로 확대되었다. 예를 들어 신해봉기때 식량과 무기를 기부했고, 항일전쟁기간과 항미원조기간에는 국가에 전투기를 기증했다. 공익은 화순인들이 집과 국가에 대한 마음을 표현하는 주요방식이다.


    XVII. 근면편: 초독성재

    화순숭문중교의 향풍은 대대로 화순영재들을 만들었고 화순에 객거하는 이방인들에게도 깊이 감염되었다. 한 악씨성의 소년의 본적은 텅총청수였고 그의 부모들은 화순에서 일하면서 이가골목에 거주했다. 화순향풍에 깊이 물들어져서 비록 가난하지만 배움에 전념하여 인재가 되겠다는 뜻을 세웠다. 학업을 완성하기 위해 오랜 세월동안 산에 가서 나무를 하며 꾸준이 노력한 끝에 명문대에 합격하여 지방의 일대 이름있는 교사가 되어 이름을 날렸다.


    XVIII. 격려편: 매차육자손 

    화순의 장병조의 아내 윤옥진은 27살에 남편을 잃고 102세에 세상을 떠났으며 75년이라는 세월을 혼자 지냈다. 남편이 죽은 후 어린 애들을 키우기 위해 건애(현재 영강현)의 길가에서 차를 팔았다. 하루하루 고생을 참고 견디어 마침대 3명의 아들들을 인재로 키웠다. 장남 장성세는 중헌대부(청나라의 문직정4품의 산관급)이고, 차남 장성요는 봉정대부(문관정5품의 산관급)이며, 막내 아들 장성패는 문림랑(문관정7품의 산관급)이다. 손자는 8명이고 또한 유명하다. 그중 장리(덕양)는 광서의 계묘과거인이다. 젊은 시절 갖은 고생끝에 장윤씨는 한때 두눈이 실명됐다가 수십년만에 회복되었다. 그가 세상을 떠난 후에 텅총교육자 왕개국은 “늙은 과부 가난때문에 차를 팔고, 그 한잔의 봄차향은 오래 남아있다; 자손들은 월전에 오르고 추파는 구순위로 유명하다”라고 글을 썼다.


    XIX. 향수편:도원선경

    “석양에 밥짓는 연기가 나고, 전원에서 목동이 돌아온다. 강가에는 웃음소리가 들리고, 마을여인들은 빨래를 하고 돌아오네. 어려서 떠나 늙어서 돌아오고, 귀밑머리가 희고 몸은 쇠약해지고, 나그네의 옷, 자애로운 어머니의 눈물, 흘러가는 세월은 물과 같노라......”

    “골목은 굽이굽이 깊고, 옛집에는 푸른 이끼가 꼈네. 산촌에는 공부하는 곳이 있고, 고도에는 풍비정자가 있네. 아침에는 금을 구하고 저녁에는 은을 구하고 세월은 어느새 지나갔네. 산은 마음을 보양하고, 물은 심성을 수양하고, 도원의 선경일세......”